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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역대 최단신 득점왕이자,

패션의 아이콘이자,

수많은 루머를 달고 다니는 선수

누가 떠오르시나요?

바로 앨런아이버슨입니다.

 

마이클조던 은퇴이후

최고의 센세이션을 일으킨 선수로

힙합과 길거리농구를 접목시킨

힙훕스타일 농구를 유행시킨 선수이며

암슬리브를 유행시킨 패션 선구자입니다.

183cm의 단신(실제로는 더 작다고합니다.)으로

NBA의 최고 선수반열에 오른 선수인

앨런아이버슨에 대해

아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앨런아이버슨은 197567

버지니아주 햄프턴에서 태어났습니다.

미혼모인 어머니는 앨런아이버슨을

출생할 때 15세였습니다.

이후 새아버지인 마이클프리먼과

같이 살았고 여동생 둘이 태어납니다.

어린시절에 지독한 가난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으로

버틸수 있었다고하네요.

 

아이버슨은 처음엔 풋볼에

큰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걸기로

마음먹기도 합니다.

쿼터백으로 뛰어난 경기 감각과

거친 몸싸움으로 다른 선수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입니다.

그러나 새아버지는

농구선수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

농구경기장에 자주데려가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

값비싼 조던시리즈 농구화를

선물로 주고 농구캠프에

등록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아이버스는 풋볼, 농구 모두

뛰어난 능력을 보이며

만능스포츠 맨으로 지역에서

엄청난 스타로 성장합니다.

 

하지만 시련이 찾아옵니다.

새아버지는 마약사건으로

중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가고

어머니는 둘째동생 산후통으로

건강악화가 되어 집안 사정이

더욱 좋지 않게 됩니다.

이때가 아이버슨이 15살이던 해였습니다.

어린 아이버슨에게

감당하기 힘든 시련으로

학업과 운동 모두 그만두고

방황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이버슨은

어머니와 두 동생을 위해 정신차리고

자신의 미래를 다시 설계합니다.

가장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풋볼에서 최고의 선수로 대접을 받아

풋볼 장학금을 받게됩니다.

그러나 가장이라는 중갑감으로

성격이 예민해지고 다혈질이 되어

학부 코치와 마찰이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농구에서는 최고의 가드라는 평가를

받으며 버지니아주 기록을 세웁니다.

948득점으로 대단한 기록을 달성하는데 

이때부터 아이버슨의 상징인 크로스오버는

이미 고등학생 수준을 휠씬넘었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시련이 찾아옵니다.

1993년 동네 볼링장에서 놀던 중

싸움에 휘말려 5년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4개월동안 교도소에서 보내는 동안

가족, 친구, 주변사람들이 청원을하였고

버지니아 주지사는

아이버슨이 부당 대우를 받았다고 인정하며

사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버슨은 학교로

돌아 갈 수 없었습니다.

평판이 좋지 않아 대학진학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일을 하면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위해

가정교사와 공부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버슨을 위해

조지타운대학의 좀톤슨 주니어에게 찾아가

사정을 했고, 좀톰슨 주니어는

아이버슨을 보고 농구부로 스카웃을 하게 됩니다.

아이버슨은 조지타운대학 2년동안

평균 23.0득점, 3.6리바운드 4.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올해의 루키선정 및

All-America Fist Team

선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결국 프로행을 결심하게됩니다.

 

 

1996NBA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때의 드래프트는

1984(하킴올라주원, 마이클조던, 찰스바클리 )

이후 최고의 드래프트 시즌이었습니다.

이때 코비브라이언트, 스티브내쉬,

저메인 오닐스테판 마버리, 레이 앨런 등

가드가 풍년인 한해에서 당당히

전체 1순위로 필라델피아로 지명됩니다.

 

아이버슨은 NBA 루키시즌부터

센세이션을 일으킵니다.

단신선수가 거구 상대로 거침없는 돌파와

화려한 덩크로 팬들은 열광을 하게 됩니다.

마이클 조던 앞에서 긴장감 없이

크로스오버 드리블로 간단하게 제치고

점프슛을 성공하는 장면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해 평균 23.5득점, 7.5어시스터, 2.1스틸을

기록으로 NBA를 씹어먹으며

신인왕을 수상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4연속 40득점과 50득점 이상

기록도 달성하였습니다.

97-98시즌 조던 은퇴이후 아이버슨은

리그 최고의 득점머신이 되었습니다.

필라델피아는 명장 래리브라운 감독을

영입하였고, 래리브라운 감독은

아이버슨 중심의 팀을 재건하게 됩니다.

아이버슨은 NBA 초기엔

포인트가드 역할을 많이 했지만

래리브라운 감독체제하에서

슈팅가드로 기용하면서

아이버슨의 공격력을 최대한

뽑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팀을 무톰보중심의 완벽한

수비팀을 만들어 약체였던 팀을

강팀으로 체질 변화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후 플레이오프 단골 손님이 됩니다.

 

00-01 시즌엔 아이버슨이

평균 31.1점으로 득점왕,

2.1스틸로 스틸왕을 차지하며

팀을 동부지구 1위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역대 11승 무패로 올라온

LA레이커스와 파이널에서

상대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비와 샤킬이 이끄는 LA레이커스의

무패우승을 예상했습니다.

필라델피아는 7차전 경기를

두 번이나 겪으면서 주전들의 부상과

지칠대로지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각종 부상에 시달리고

LA레이커스보다 7경기나

더 뛰고 올라온 필라델피아가

아이버슨을 주축으로 LA레이커스를

원정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아이버슨이 48점을 쏟아부으며

활약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리 4연패를 당하며

시즌이 종료됩니다.

하지만 역대 최강이라고 불리우는

LA레이커스 상대로 원정경기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온몸에 10군데가 넘는 골절과 타박상을 안고

팀을 파이널까지 올려놓았고

승리에 대한 열정과

투혼을 보여준 아이버슨에게

모두들 환호를 하였습니다.

 

다음 시즌도 아이버슨이 득점왕을 차지합니다.

당시 동부리그에는

케빈가넷, 크리스웨버, 팀던건 등의

훌륭한 장신 선수들이 많았는데

이런 신장 열세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팀은 점점 약해져가고 있었습니다.

두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는

진출했지만 조기에

탈락하게됩니다.

결국 래리브라운 감독이

사임을 하게되고 필라델피아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아이버슨은 팀불화 끝에

06-07시즌 덴버로 드레이드 됩니다.

당시 최고의 신성중에 한명인

케멜로 앤서니가 있어

둘의 조합을 큰 기대했지만

죄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탈락했습니다.

한계를 느낀 덴버는 아이버슨을

디트로이트로 트레이드 합니다.

이후 아이버슨은 여러 팀에 전전하며

저니맨으로 전락하다가

2010시즌을 마지막으로 코트에서

사라지게됩니다.

이후 터키리그와 계약하여

경기를 뛰었지만 큰 활약없이

여러 루머만 남긴채

20131030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홈구장인

웰스 파고 센터에서 공식적으로

은퇴발표를 했습니다.

 

드래프트 전체 1번픽, 신인왕,

득점왕 4회, 최단신 정규시즌 MVP,

2회 올스타 MVP 등의 

수많은 커리어를 기록한 아이버슨

과연 제2의 아이버슨이 나올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론 제2의 마이클조던보다 

힘들것 같네요.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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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바클리

위대한 전설인 마이클조던이 군림하던 시절

마이클조던 외에 누구를 떠오르시나요?

저는 찰스바클리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포지션은 달랐지만 마이클조던 만큼

임팩드가 있었던 선수였습니다.

 

그럼 오늘은 찰스바클리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찰스 바클리(charles Wade barkley)

 

1963년 2월 20일출생 (앨라배마주)

오번대학교 출신

신체: 198cm 110kg 이상

포지션: 파워포워드, 스몰포워드

소속팀: 필라델피아, 피닉스, 휴스턴

수상: MVP 1회, 리바운드왕 2회

 

작은 키로 NBA 골밑은 지배했던 찰스바클리

어린시절은 매우 불우한 환경이었습니다.

고향인 앨바라마주는 인종차별이 굉장히 심하였고

극심한 가난 때문에 아버지가 집을 나가버려

할머니, 어머니, 형제들과 살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교육으로

올바르게 성장하였습니다.

고교시절 바클리는

180cm도 안되는 작은키와

100kg이 넘는 과체중으로

리저브 팀에도 끼지 못했는데

192cm로 급격히 커지면서 고등학교에서

주전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몸무게도 110kg 이상으로 늘어났는데

다른 과체중 선수와는 달랐습니다.

체격에 비해 순발력과 점프력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순발력은 포인트 가드보다도

빨랐다고 하니 상상이 가시나요?

제자리 점프가 1m가 넘었다고하네요

이런 신체조건으로 찰스바클리는

올라운드 플레이로 활약을 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평균 19.1점, 17.9 리바운드

정말 대단한 기록입니다.

오번 대학의 소니 스미스 감독은

찰스바클리를 보고

"저 뚱보 바람처럼 달리는데??"

이렇게 눈도장을 찍힌 찰스바클리는

오번대학교로 리쿠르팅됩니다.

 

대학생활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스파르타식의 스미스감독과의 문제로

팀을 무단이탈 하는 사건도 있었는데

어머니의 설득으로 학교로 돌려보냈고

감독과의 화해를 통해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농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플레이는 연일 화제거리였습니다.

과체중인 선수가 누구보다 빠르고

다른 빅맨보다 훌륭한 리바운드 능력

화려한 덩크는 보는사람들이

엄지척을 안할수 없겠죠?

 

바클리의 오번대학 성적은 

평균 14.1 득점, 9.6 리바운드,

1.6어시스트, 1.7블록

이런 뛰어난 결과를 배경으로

NBA문을 두드립니다.

 

1984년 NBA 드래프트는

역사상 최고의 드래프트였습니다.

하킴올라주원, 마이클조던, 존 스탁턴 등

명예인전당만 4명을 배출한 드래프트였고

다른 유능한 선수들도 대거 배출된 해였습니다.

바클리는 전체 5순위로

필라델피아에 지명됩니다.

필라델피아는 당대 최고의 센터인

줄리어스 어빙이 이끌고 있었습니다.

바클리 신인시절 도움을 준 모제스 말론과 줄리어스 어빙

존경하던 줄리어스 어빙과 경기를

함께 뛴다는 것에 감격스러워 하여

몸무게를 감량하고(130kg대->110kg대)

루키로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평균 14득점, 8.6리바운드

2년차부터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하는데

평균 20득점 12.8리바운드

3년차는 평균 25득점 15.8리바운드로

이때 동부지구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보스턴에 막혀 아쉽게 막혀버립니다.

이 준우승이 찰스바클리의

운명이었나봅니다. ㅠ.ㅠ

 

이후 바클리의 기량은 정점을 찍었지만

팀 성적은 플레이오프에서 매년 탈락합니다.

팀의 소극적인 선수영입에 뿔난

바클리는 트레이트 요구를 하였고

91-92 시즌을 끝으로 

피닉스 선즈로 트레이드 되었습니다.

그리고 피닉스 선즈에서

바클리의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이적하자마자 경기당

평균 25.6점, 12.2개의 리바운드로

팀을 62승20패라는

좋은 성적을 이끌었으며

중하위에서  우승후보로

격상시켰습니다.

 

강력한 서부의 팀들을 침몰시켰고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물리치고 생애 처음으로

파이널 무대에 올라갑니다.

이때 바클리는 44점 24리바운드를

기록하였습니다.

상대는 NBA 3연속 우승에 도전하는

시카고불스 마이클조던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피닉스도 선전하였지만 우승은

시카고불스의 것이었습니다.

찰스바클리는 파이널 6경기에서

27득점 13.5리바운드 5.5어시스트하며

훌륭한 활약을 했지만 

마이클조던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아쉬운 시즌을 마친 찰스바클리에게

힘든 시련이 찾아옵니다.

93-94 시즌 도중 오른쪽 사두근이

찢어졌는데 이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3시즌 동안은 전매특허인 2

0득점 1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했지만

과체중이 발목을 잡아

지속적인 발목, 무릎 등의

잔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출전 경기 숫자도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피닉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은 95-96 시즌이던

23.3 득점, 11.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올랐지만

데이비드 로빈슨의 샌안토니오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이 때 통산 2만득점 1만리바운드를

달성한 10번째 선수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33세가 된 찰스바클리는

96-97시즌, 우승반지를 위해

하킴올라주원과 드렉슬러가 있는 

휴스턴 로케츠로 이적을 합니다.

왼쪽부터 찰스바클리, 하킴올라주원,    클리이 드렉슬러

우승에 목말라 있던 바클리클리는

자신의 고유 백넘버 34번을 포기하고

이적을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34번은 하킴올라주원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컴백을 선언한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불스와

3인방이 모인 휴스턴 로케츠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려있었지만

파이널은 시카고불스와 유타째즈였습니다.

휴스턴 로케츠는  승승장구하며

서부 컨퍼런스 결승전까지 올랐지만

유타재즈의 존스탁턴과 칼말론의 공격에

당하며 파이널 문턱에서 좌절하게 됩니다.

97-98시즌 바클리의 부상은 더욱 악화되었고

올라주원의 부상까지 겹쳐지면서 팀 성적은

추락하였지만 턱걸이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합니다.

하지만 샤킬오닐의 LA레이커스에 무기력하게

패하여 시즌을 마무리합니다.

 

99-00시즌 필라델피아 원정경기 도중 무릅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시즌 아웃됩니다.

마지막 은퇴경기를 위해 재활에 들어갔고

4개월 후 밴쿠버 그리줄리스와의 경기에서

6분간 2득점 1리바운드 1블록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화려했던 선수생활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찰스바클리는

2만득점, 1만리바운드, 4천어시스트를

기록한 NBA 역사상 4명중 한명이며

비록 우승반지는 얻지 못했지만

그의 강력하고 화려했던 플레이는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위안에

들어갈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바클리는 은퇴 이후 TNT 해설위원으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거침없는 입담과 특유의 예능감으로

인기 많은 해설가 겸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어쩌면 앞으로도

찰스바클리와 같은 유형은

볼수 없을것 같습니다.

작은 키로 NBA 빅맨들을

압도할수 있는 선수가

또 나올수 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NBA 팬들은

찰스바클리에 더욱 열광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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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는 몰라도 이름은 누구나 아는 농구선수'

바로 마이클조던 아닐까요?

기록뿐만 아니라 화려한 선수생활로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최다득점왕(총 10시즌)

6번의 챔피언쉽 우승

6번의 파이널 MVP

5번의 시즌 MVP

2번의 올림픽 금메달

 

기록에서 볼수 있듯이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도 잘하는 선수였고

승부욕이 엄청 강해서

지고 못사는 선수였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마이클 조던의

농구이야기를 해볼까요?

 

마이클 조던은 1963년 2월27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년시절은 농구를 좋아하는

또래 아이들과 다를바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주대회

MVP 실력의 준수한 실력을 뽑냈던

야구를 그만두고 농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180cm의 단신 가드에

불가했던 조던은 팀 선발에서

제외가 됩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1학년때

NCAA 결승전에서

황금같은 결승골을 성공시키면서

우승을 차지하고 전국구 스타로 떠오릅니다.

 

3학년인 1984년에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되는데

그 당시는 센터 시대이다보니

조던은 하킴올라주원 샘보위에 이어

3순위로 시카고 불스에 지명이 됩니다.

 

참고로 1984년 NBA 신인 드래프트는

역사상 최고의 드래프트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명예의 전당 입성자만

4명을 배출했고 그 외에도

수준급의 선수들이 많이 배출된

드래프트 였기 때문입니다.

1순위 하킴올라주원, 3순위 마이클조던, 5

순위 찰스바클리, 16순위 존스탁턴 등

 

만약 시카고가 드래프트 1순위 티켓을

가졌다면 누구를 선택했을 까요?

실제로 하킴올라주원을

지명했을거라고 합니다.

그럼 불스 신화도 없었겠죠? ^^;

 

 

 

본론으로 돌아와서

시즌이 개박하자마자 1순위였던

하킴 올라주원보다 눈부신 활약을 하였고

그 당시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줄리어스어빙, 매직존슨, 래리버드를

능가할 정도로 엄청난 실력을 뽑냅니다.

그해 82경기 전부 뛰면서 28.2점,

6.5리바운드, 5.9어시스트

2.4스틸 0.8블록을 기록하며

신인왕을 수상받습니다.

 

 

1985년 에어조던 1 농구화가

발매가 되었습니다.

이 때 나이키에서는

'사람이 왜 하늘을 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광고문구와 함께

하늘을 나는 선수로서의

마이클 조던 이미지를

강조했습니다.

 

이런 이미지와 함께 실제로

화려한 공중 퍼포먼스가 펼쳐지니

마이클조던 신드롬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실제 1988년에 보여준 

일명 자유트라인 덩크는

촉매제가되어 신드롬은 광적으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1987년 처음으로 득점왕 수상 후

80년대 내내 득점왕 이었습니다.

하지만, 동료의 부재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 못했어요.

1988년 필잭슨 감독을 만나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트라이앵클 오펜스를 만들어

마이클 조던 위주의 공격에서

팀플레이 방식으로 변화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배드보이즈가 이끄는

디트로이트한테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맙니다.

이에 굴복당할 마이클조던이 아니죠?

복수를 위해 벌크업을 하였고

피펜, 그랜트 등의 동료들 성장으로

팀의 한단계 도약을 이루어 냈습니다.

 

 

90~91시즌에 플레이오프에서

디트로이트를 4-0으로 척살하여

결승전에 진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매직존슨의 LA레이커스를

결승전에서 4:1로 꺽으며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하고

MVP까지 받습니다.

 

그 당시 시카고 불스는 마이클조던 외에

별볼일 없는 팀이었지만 

주위 상황에 타협하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하여

결국 팀의 첫 우승컵을

들어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속으로 우승하여

3연패를 달성하였습니다.

물론 MVP는 마이클조던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이클조던에게도

인생 최대의 시련이 찾아옵니다.

1993년 아버지가 10대 강도들을 만나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충격으로 NBA 은퇴 선언을 하는데

 

이후 야구선수로 전향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소원이었던 야구선수의 꿈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하네요

 

 

NBA리그 진행중이던 1995년 3월

은퇴한 농구황제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기량이 녹슬었다는 우려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시즌 전 영입한

악동 데니스 로드맨과

잘 어울릴지 의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이클조던은

이런 우려를 일축시키며

무서운 페이스로 승리를 하였고

그해 72승 10패라는 경악할 수준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합니다.

이어 내리 3연패 우승을 달성...

 

이렇게 두번의 3연속 우승을 달성한

마이클 조던은 1999년

가장 멋있는 은퇴식을 끝으로

농구계를 떠났습니다.

 

 

 

또다시 조던은 2000년 코트로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경영하던 구단인 워싱턴 위저즈에

선수로 들어가게 됩니다.

개인 플레이보다는

어린 선수들을 독려하는 역할을 했지만

팀은 하위권에 맴돌게 됩니다.

그럼에도 개인 기록은 평균 20점대였습니다.

비록 전성기 시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당시 40세인 것을 감안하면

믿기 힘든 경기력을 보여준것입니다.

그리고 2003년 농구인생의

마직막 은퇴를 발표하며

그의 선수 생활은 막을 내립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포츠 선수이자

NBA 최고의 선수인 마이클조던

아직도 전 세계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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