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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NBA 스타 무관의 제왕 찰스바클리

유레카유레카 2020. 5. 1. 23:37

찰스바클리

위대한 전설인 마이클조던이 군림하던 시절

마이클조던 외에 누구를 떠오르시나요?

저는 찰스바클리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포지션은 달랐지만 마이클조던 만큼

임팩드가 있었던 선수였습니다.

 

그럼 오늘은 찰스바클리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찰스 바클리(charles Wade barkley)

 

1963년 2월 20일출생 (앨라배마주)

오번대학교 출신

신체: 198cm 110kg 이상

포지션: 파워포워드, 스몰포워드

소속팀: 필라델피아, 피닉스, 휴스턴

수상: MVP 1회, 리바운드왕 2회

 

작은 키로 NBA 골밑은 지배했던 찰스바클리

어린시절은 매우 불우한 환경이었습니다.

고향인 앨바라마주는 인종차별이 굉장히 심하였고

극심한 가난 때문에 아버지가 집을 나가버려

할머니, 어머니, 형제들과 살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교육으로

올바르게 성장하였습니다.

고교시절 바클리는

180cm도 안되는 작은키와

100kg이 넘는 과체중으로

리저브 팀에도 끼지 못했는데

192cm로 급격히 커지면서 고등학교에서

주전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몸무게도 110kg 이상으로 늘어났는데

다른 과체중 선수와는 달랐습니다.

체격에 비해 순발력과 점프력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순발력은 포인트 가드보다도

빨랐다고 하니 상상이 가시나요?

제자리 점프가 1m가 넘었다고하네요

이런 신체조건으로 찰스바클리는

올라운드 플레이로 활약을 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평균 19.1점, 17.9 리바운드

정말 대단한 기록입니다.

오번 대학의 소니 스미스 감독은

찰스바클리를 보고

"저 뚱보 바람처럼 달리는데??"

이렇게 눈도장을 찍힌 찰스바클리는

오번대학교로 리쿠르팅됩니다.

 

대학생활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스파르타식의 스미스감독과의 문제로

팀을 무단이탈 하는 사건도 있었는데

어머니의 설득으로 학교로 돌려보냈고

감독과의 화해를 통해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농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플레이는 연일 화제거리였습니다.

과체중인 선수가 누구보다 빠르고

다른 빅맨보다 훌륭한 리바운드 능력

화려한 덩크는 보는사람들이

엄지척을 안할수 없겠죠?

 

바클리의 오번대학 성적은 

평균 14.1 득점, 9.6 리바운드,

1.6어시스트, 1.7블록

이런 뛰어난 결과를 배경으로

NBA문을 두드립니다.

 

1984년 NBA 드래프트는

역사상 최고의 드래프트였습니다.

하킴올라주원, 마이클조던, 존 스탁턴 등

명예인전당만 4명을 배출한 드래프트였고

다른 유능한 선수들도 대거 배출된 해였습니다.

바클리는 전체 5순위로

필라델피아에 지명됩니다.

필라델피아는 당대 최고의 센터인

줄리어스 어빙이 이끌고 있었습니다.

바클리 신인시절 도움을 준 모제스 말론과 줄리어스 어빙

존경하던 줄리어스 어빙과 경기를

함께 뛴다는 것에 감격스러워 하여

몸무게를 감량하고(130kg대->110kg대)

루키로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평균 14득점, 8.6리바운드

2년차부터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하는데

평균 20득점 12.8리바운드

3년차는 평균 25득점 15.8리바운드로

이때 동부지구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보스턴에 막혀 아쉽게 막혀버립니다.

이 준우승이 찰스바클리의

운명이었나봅니다. ㅠ.ㅠ

 

이후 바클리의 기량은 정점을 찍었지만

팀 성적은 플레이오프에서 매년 탈락합니다.

팀의 소극적인 선수영입에 뿔난

바클리는 트레이트 요구를 하였고

91-92 시즌을 끝으로 

피닉스 선즈로 트레이드 되었습니다.

그리고 피닉스 선즈에서

바클리의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이적하자마자 경기당

평균 25.6점, 12.2개의 리바운드로

팀을 62승20패라는

좋은 성적을 이끌었으며

중하위에서  우승후보로

격상시켰습니다.

 

강력한 서부의 팀들을 침몰시켰고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물리치고 생애 처음으로

파이널 무대에 올라갑니다.

이때 바클리는 44점 24리바운드를

기록하였습니다.

상대는 NBA 3연속 우승에 도전하는

시카고불스 마이클조던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피닉스도 선전하였지만 우승은

시카고불스의 것이었습니다.

찰스바클리는 파이널 6경기에서

27득점 13.5리바운드 5.5어시스트하며

훌륭한 활약을 했지만 

마이클조던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아쉬운 시즌을 마친 찰스바클리에게

힘든 시련이 찾아옵니다.

93-94 시즌 도중 오른쪽 사두근이

찢어졌는데 이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3시즌 동안은 전매특허인 2

0득점 1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했지만

과체중이 발목을 잡아

지속적인 발목, 무릎 등의

잔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출전 경기 숫자도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피닉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은 95-96 시즌이던

23.3 득점, 11.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올랐지만

데이비드 로빈슨의 샌안토니오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이 때 통산 2만득점 1만리바운드를

달성한 10번째 선수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33세가 된 찰스바클리는

96-97시즌, 우승반지를 위해

하킴올라주원과 드렉슬러가 있는 

휴스턴 로케츠로 이적을 합니다.

왼쪽부터 찰스바클리, 하킴올라주원,    클리이 드렉슬러

우승에 목말라 있던 바클리클리는

자신의 고유 백넘버 34번을 포기하고

이적을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34번은 하킴올라주원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컴백을 선언한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불스와

3인방이 모인 휴스턴 로케츠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려있었지만

파이널은 시카고불스와 유타째즈였습니다.

휴스턴 로케츠는  승승장구하며

서부 컨퍼런스 결승전까지 올랐지만

유타재즈의 존스탁턴과 칼말론의 공격에

당하며 파이널 문턱에서 좌절하게 됩니다.

97-98시즌 바클리의 부상은 더욱 악화되었고

올라주원의 부상까지 겹쳐지면서 팀 성적은

추락하였지만 턱걸이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합니다.

하지만 샤킬오닐의 LA레이커스에 무기력하게

패하여 시즌을 마무리합니다.

 

99-00시즌 필라델피아 원정경기 도중 무릅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시즌 아웃됩니다.

마지막 은퇴경기를 위해 재활에 들어갔고

4개월 후 밴쿠버 그리줄리스와의 경기에서

6분간 2득점 1리바운드 1블록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화려했던 선수생활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찰스바클리는

2만득점, 1만리바운드, 4천어시스트를

기록한 NBA 역사상 4명중 한명이며

비록 우승반지는 얻지 못했지만

그의 강력하고 화려했던 플레이는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위안에

들어갈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바클리는 은퇴 이후 TNT 해설위원으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거침없는 입담과 특유의 예능감으로

인기 많은 해설가 겸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어쩌면 앞으로도

찰스바클리와 같은 유형은

볼수 없을것 같습니다.

작은 키로 NBA 빅맨들을

압도할수 있는 선수가

또 나올수 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NBA 팬들은

찰스바클리에 더욱 열광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